남수단의 에티오피아 접경지인 보마 고원(Boma Plateau) 일대는 에티오피아 밖의 몇 안 되는 야생 아라비카 커피 자생지입니다. 남수단의 야생 커피의 유전적 다양성은 에티오피아의 야생 커피와 비견될 만큼 풍부합니다. 그러면서도 유전적으로 에티오피아 그룹과 구별되는 독특함이 있어서 남수단의 커피는 수단 그룹(Sudan Group), 수단 랜드레이스(Sudan Landrace)로 분류됩니다. 아라비카 커피의 원산지가 어쩌면 에티오피아가 아니라 남수단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에티오피아가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커피 산지인 것과는 반대로 남수단은 커피 산지로서는 생소하게 느껴집니다. 20세기 중반부터 2010년대까지 반 세기 넘는 내전으로 남수단의 경제와 사회가 완전히 무너져 버려 커피 재배가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공식적으로 내전이 종식된 2020년대에도 남수단의 안정과 커피 산업의 재건은 요원합니다. 남수단의 커피가 에티오피아 커피만큼 유전적 다양성이 풍부함에도 남수단의 커피의 맛을 볼 수 없는 이유입니다.하지만 남수단의 커피가 아주 생소하지만은 않습니다. 커피 품종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이름에서부터 수단 토착 커피의 정체성이 강조되는 수단 루메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보마 고원의 루메 계곡의 이름을 딴 수단 루메는 수단 랜드레이스를 대표하는 품종입니다. 1940년대에 발견되었지만 2010년대에 빛을 보게 된 늦깍이 품종이기도 합니다. 수단 루메는 뿌리가 튼튼하고 커피열매병(CBD, Coffee Berry Disease)과 녹병(CLR, Coffee Leaf Rust)에 강하며 높은 품질까지 갖췄습니다. 이러한 장점은 수단 루메가 발견된 1940년대부터 일찍이 유명했지만 생산성이 낮다는 치명적인 단점 탓에 커피 농장의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그럼에도 수단 루메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중요한 품종으로 활약해 왔는데, 이유인즉 커피 품종 육종 분야에서 수단 루메의 장점이 눈에 띄게 발휘되었던 것입니다. 수단 루메가 사용된 대표적인 품종은 SL28, 센트로아메리카노(Centroamericano), 밀레니오(Milenio) 등으로 이들은 커피 플레이버 품질과 튼튼한 생명력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밝은 산미와 과일, 꽃 아로마가 선명한 SL28의 특성은 수단 루메에게 물려받은 형질로 추측되기도 합니다. 스페셜티 커피 시대의 문이 활짝 열린 2010년대가 되자 수단 루메의 단점은 더이상 단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열매가 적게 열리는 대신 각각의 열매에 양분이 집중되어 질 좋은 맛과 향 성분이 풍부해집니다. 이뿐만 아니라 질병에 강하고 튼튼하기까지 하니 스페셜티 커피 생산자들에게 매력적인 품종으로 조명받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결국 2015년 세계바리스타대회(WBC, World Barista Championship) 챔피언 사샤 세스틱(Sasa Sestic)의 시연을 통해 스페셜티 커피 시장에 화려하게 등장함으로써 가치를 증명했습니다. 수단 루메의 향긋하고 복합적인 꽃과 과일, 그리고 소박한 허브의 플레이버와 산미는 인마쿨라다 농장(Inmaculada)의 깨끗하고 클래식한 프로세싱부터 엘 트리운포 농장(El Triunfo)의 다양하고 혁신적인 프로세싱까지 어떤 프로세싱을 만나든 은은하고 우아하게 전개됩니다. 다른 아라비카 커피와 비슷한 듯 하지만 강렬한 자극 없이도 플레이버가 투명하게 돋보이는 수단 루메만의 특별한 개성은 수단 랜드레이스의 유전적 다양성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수단 루메의 존재는 에티오피아 랜드레이스와 더불어 유전적 다양성이 스페셜티 커피의 다양성과 지속가능성을 완성하는 퍼즐임을 상징합니다.